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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편완식의 화랑가 산책] 김기라 작가 NO 버튼 ON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 풀어내
2015-12-30



전시가 열리는 건물 입구에 NO와 ON이 조합된 조형물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그 위로 붉은 기운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진원지는 붉은색 필름으로 선팅된 유리벽이다. 건물 밖을 지나는 사람이 안을 들여다봐도, 안에 있는 사람이 밖을 내다봐도 온통 붉게 보인다. 이념의 덮개를 서로 씌워 ‘너는 NO라는 버튼을 계속 ON 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김기라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의 풍경이다.

작가는 수도 없이 갈등의 현장에 영상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 밀고 밀리는 경계 지점에서 날아오는 주먹들을 모두 감내해야 했다. 그를 더욱 서글프게 한 것은 그 경계에선 욕설만이 난무한다는 사실이다. 이념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조건 NO의 ON이다.

로비에 설치된 영상작품도 눈길을 끈다. 두 남녀가 화려한 꽃무늬 스카프로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향하려고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영상이다. 꽃무늬 스카프는 이념을 은유하고 있다. 화려한 수사의 이념만 가지고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스스로 이념의 눈가리개를 벗고 상대를 바라볼 때 길은 보이게 마련이다.


작가는 납북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도 작품으로 풀어냈다. 지난 2월23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 당시 실제 이산가족들이 나눈 대화를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화면은 도입부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인 진달래가 등장한 이후 어떤 이미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각각의 장을 알리는 자막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지 영상이 없는 영상 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상봉 장면을 보아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례적인 무덤덤이가 됐다. 작가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성우들의 음성만 들리는 무영상 작품의 울림은 더 컸다. 예전에 눈물을 쏟았던 라디오극장을 방불케 한다. 분단국가라는 뼈아픈 현실을 다시금 환기해 준다. 전시회는 다음달 5일까지 열린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페리지갤러리(대표 김종숙)는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휴대용 기기의 내·외장재 조립모듈을 생산하는 ㈜KH바텍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 공간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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