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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GEE GALLERY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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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상·설치·조각 등 장르 넘나드는 작가 김기라, ‘마지막 잎새’로 불편한 진실을 꼬집다
2015-12-30
드로잉 작품들을 배경으로 선 김기라 작가. | ⓒ이도영
드로잉 작품들을 배경으로 선 김기라 작가. | ⓒ이도영


희망과 절망의 어디쯤을, 우리는 가고 있을까
깊은 어둠 속 공간인 지하 2층 음악연주홀. 무대에는 연주자 대신 비디오 스크린이 걸려 있지만 스크린에는 어떤 영상도 없다. 다만 어둠 속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지난 2월23일, 금강산)에서 어르신들이 주고받은 애끊는 대화가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들린다. “60여년 동안 찾아올 거라 믿고 이사를 안 했다, 대문도 열어 놓고….” 울먹이느라 말이 끊어지기도 하고, 만남의 기쁨에 환호성이 터지기도 한다. 이산가족들 가슴에 쌓인 숱한 사연, 아픔이 묻어난다. “꼭꼭 다시 보자…”는 애절한 다짐은 오히려 만날 수 없을 것이란 말로 들려 관람객을 울린다.
김기라 작가(40)의 비디오작품 ‘이념의 무게-마지막 잎새’는 신선한 방식의 감동을 경험케 한다. 비디오작품은 당연히 시각적 이미지가 강조된다. 광고, 미디어아트 등에서 보듯 시각적 이미지는 직접적·원초적·자극적이다. 요즘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이유다. 김 작가는 그러나 시각보다 청각을 강조했고,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느끼는 작품은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남북 어르신이 만나 얼싸안거나, 볼을 비비고, 서로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까지 떠오른다. 영상으로 볼 때보다 이산가족의 아픔이 진하게 상상되면서 여운과 울림이 길고도 깊다. 관람객의 오감을 새삼 일깨우고, 이산가족의 한마저도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이용한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작가는 “모든 대화는 상봉장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며 “예술가로서 새 표현방식을 통해 분단체제라는 우리 현실을 되새김질했다”고 말한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김 작가가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개인전 ‘마지막 잎새’를 열고 있다. 그는 영상과 설치, 사진 등 장르를 넘나들며 우리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구조, 이데올로기는 물론 고정관념이나 편견, 욕망, 심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인문학적 깊이와 자신만의 철학·시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업은 사회구조와 개인에게 녹아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편한 진실을 진중하게 다루거나 때로는 희화화함으로써 관람객의 삶, 가치관을 환기시키고 예술, 예술가의 역할과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페리지갤러리 개관전인 이 작품전은 ‘이념의 무게’ 연작인 비디오작품과 설치·드로잉·조각으로 구성됐다. 페리지갤러리는 (주)KH바텍이 음악에 이어 미술 지원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으로 최근 마련했다. 김 작가는 전시장이 자리한 KH바텍 사옥 로비 유리창에 온통 붉은 필름을 붙였다. 로비에 서면 붉은 색안경을 낀 듯 안이나 밖이나 모든 것이 불그스름하다. ‘이념의 무게-붉은 필터-검열’이란 설치작품으로 한국 사회에서 유독 ‘민감한 색’을 통해 편견, 편가르기, 불통, 나아가 권력자의 검열 방식을 비꼰다.
로비에서는 ‘마지막 잎새’(지하 2층 연주홀)를 제외한 다른 4개의 비디오작품이 상영된다. 서로 끈으로 묶인 2명의 무용수가 혼자 살아남겠다는 듯 밀치거나 넘어뜨리지만 결국 1명이 넘어지면 다른 1명도 넘어질 수밖에 없다. ‘정글의 법칙’을 내세우는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다른 작품에선 예쁜 꽃이 수놓아진 스카프로 눈을 가린 무용수들이 이리저리 헤맨다. 그들의 눈 앞엔 예쁜 꽃으로 상징되는 이상이 있지만 현실 속에선 우왕좌왕하며 넘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사회의 정글의 법칙, 이상과 현실 등을 기발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설치작품 ‘이념의 무게-붉은 필터-검열’
설치작품 ‘이념의 무게-붉은 필터-검열’비디오작품 ‘이념의 무게-수정된 시각-진달래 꽃’
비디오작품 ‘이념의 무게-수정된 시각-진달래 꽃’
작가는 “인물들의 행위는 답답함, 긴장감, 불안감을 전한다”며 “근래 관심을 가진 주제인 ‘공동선’에 대한 다양한 사유가 가능하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로비 한가운데, 상하좌우 사방 어디에서 봐도 ‘ON’자와 ‘NO’자가 하나로 연결된 조각은 진보와 보수, 노사 등 끝없는 갈등 속의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공존과 소통을 강조한다. 드로잉 40여점(지하 1층)은 작가의 깊은 사유를 생생한 날것으로 보여준다. 이번 출품작은 물론 지난 작품들, 아직 아이디어 상태인 작품들의 고갱이를 압축해 개념화시켜 드로잉으로 드러냈다. 드로잉이 그저 밑그림이 아니라 어엿한 작품으로 주목받는 이유를 새삼 보여준다. 신승오 페리지갤러리 디렉터는 “김 작가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이 시대에 우리의 정체성을 되짚으며 ‘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술가는 작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고 평가했다. 마지막 잎새는 희망적이기도, 절망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희망적일까, 절망적일까. 7월5일까지. 070-4676-7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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